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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프터썬

솔빛시인 2023. 2. 4. 23:50

애프터썬

보는 순간 마음을 확 채가는 영화도 있지만, 애프터썬은 자기만의 속도로 유유히 흘러가 관객과 만나는 영화다.
사람마다 그 지점은 안 올 수도, 다를 수 있지만 난 중반부터 몰입해서 엔딩에선 마스크가 젖을 정도로 울었다.
집에서 가까운 예술영화관은 엔딩크레딧이 올라갈 때 까지 불을 켜지 않는다.
오늘만큼 그 시간이 고마운 적이 없었다. 스크린을 보며 흐르는 눈물을 닦고 내 마음을 다독였다.

장르마다 그만의 언어가 있다. 문학, 드라마, 연극, 뮤지컬… 여러 장르를 넘나드는 시대지만 자기만의 언어를 갖고 있는 작품을 좋아한다.
애프터썬은 영화 언어를 제대로 보여주는 작품이다.


(아래 영화 내용이 많이 나옵니다. 영화 보고 읽어주세요. 🙏🏼)








비디오 카메라 필름을 되감는 소리로 시작하며 관객은 그 소리에 따라 90년대 튀르키예로 여름 휴가를 떠난 아빠와 딸을 만난다.
그리고 영화 내내 중간 중간 번쩍이는 화면으로 여러 사람이 보인다.
아마 댄스파티가 벌어지는 곳이고 딸이 커서 성인이 된 모습.. 그리고 영화가 엔딩을 향하며 그 곳엔 아버지가 있다.
캠코더로 찍힌 영상도 중간 중간 나오는데 그 모습과 영화로 보여지는 건 편집도 자연스럽고 관객이 점점 그들의 이야기에 빠지게 만드는 효과도 있다.

사실 영화보면서 초반엔 집중을 못했다. 나에겐 아빠와 딸의 여행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이고, 영화도 잔잔한 편이라 집중이 잘 안됐다.
그러나 영화는 그만의 속도로 흘러가 나와 만났다.
내 아버지와 좋은 추억을 떠올린 건 아니지만 나도 소피의 캠코더 처럼 오래 전 여행이 떠올랐다.
어렸을 때 제대로 가 본 가족 여행은 13살 여름 방학 때 강원도 여행이 유일하다. 일주일 정도 갔다 왔는데, 친척들을 만나고 작은 바닷가에서 놀고 그러다 돈이 떨어져 아버지가 물었다.
숙소를 잡을래 회를 먹을래.
우린 다 회를 먹겠다고 했고 숙박을 잡지 못해 코란도 차에 다섯 식구가 그냥 의자만 좀 제끼고 누워 잠을 청했다.
자다가 새벽에 잠깐 깨서  바라본 주문진 밤하늘을 잊지 못한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름다운 풍경인데 그 땐 무서웠다. 무서울만큼 그렇게 별이 징그럽게 많았다.
밤하늘에 별이 그렇게 많은지 몰랐다.
정확한 장면은 기억나지 않지만 영화 중반쯤 난 주문진 밤하늘이 생각났고 사랑에 빠졌다.

이야기는 단순할 수 있지만 두 사람 사이의 말하지 못한 감정은 영화적인 언어로 보여준다.
딸이 없을 때 비디오 카메라로 찍은 걸 확인하는 아빠, 작은 브라운관 TV에 비춰진 두 사람, 썬탠하는 모습, 거울에 뿌려진 물방울…
못 보던 이미지라 눈에 띄기도 하지만 그들의 감정을 보여준다는 점이 좋았다.
두 사람은 대화도 많고 좋은 부녀 사이로 보이지만 부모는 이혼했고, 아빠는 형편이 좋지않다. 딸은 내색하지 않지만 어느 정도 알고 있고, 사춘기 호기심도 많고 언니 오빠들이 궁금하다.
그런 모습이 딸 소피가 옷을 바꿔 입거나 눈빛, 행동등으로 표현된다. 아빠인 캘럼은 우울하고 그런 모습이 캠코더를 확인하거나 후반부 바다에 뛰어들거나 울고 있는 뒷모습으로 나온다.
아빠도 나이가 많지 않고 제 길도 잘 찾지 못했지만 그래도 딸에게 자신의 감정을 내색할 수 없다는 걸 영화는 보여준다.
석고붕대를 하고 와서 붕대를 떼어내다 실수로 다치지만 화장실에서 딸을 부르지 않는다. 아픈 모습은 조금이라도 보여줄 수 없는 게 부모 마음일 거다.

엔딩에서 보면 아기 울음 소리가 들리고 20년 지나 아마 서른살 정도 된 소피가 캠코더를 보고 있다.
내 아이를 낳고 캠코더를 돌려 11살 여름방학을 추억한다. 그땐 몰랐던 게 보이지 않았을까.
캠코더는 아버지의 사랑이었다. 엔딩에 내가 그렇게 눈물이 났던 건 그 캠코더를 아버지는 얼마나 돌려보았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내 아버지의 사랑은 모르겠지만 난 아빠인 캘럼도, 소피의 입장도 될 수 있기에 부녀 사이로 한정짓지 않고 인간의 사랑으로 그들을 보았다.
인간은 망각이 있어 살아가지만 때론 가슴에 맺힌 기억으로 살 수 있다.

이런 영화는 하루 종일 아니 앞으로 계속 보고 싶다.
영화 제목처럼 계속 덧바르고 싶다. 태양 아래 after sun 서로 선크림 aftersun 을 발라주던 캘럼과 소피처럼.
이 글을 OST를 들으며 썼다. 삽입곡들도 좋으니 찾아서 들어야지.
내 마음이 반이나 담겼나 모르겠다. 또 보면 다른 글을 쓸 수 있지 않을까.
벌써 올해의 영화를 만난 거 같아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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